워낙 이것저것 많이 하는 편인지라,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하냐 물으면 곰곰히 생각하다 멋쩍게 대답하곤 한다. “디자이너예요.”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간혹 “패션디자이너요?”라고 되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나는 하하 웃으며 “그래픽 디자이너예요.” 라고 다시 답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패션디자이너가 되고싶‛었’다. 재수생 시절 포기한 꿈이니까 대략 10년 전에는 막연히 이 나이를 먹으면 패션디자이너가 되었겠거니 하고 있었다. 그래, 다들 예상했겠지만 나는 결국 패션디자이너가 되지 못했다. 10여 년 전 어느 날. 내가 다니던 미술학원에서 전시회를 열 테니 각자 하고 싶은 주제를 생각해 보라고 원장 선생님이 말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당연히 옷을 만들겠다며 큰소리를 뻥뻥 쳤고, 마음이 맞는 친구와 듀엣을 결성했다. 난생 처음 콘셉이란것도 잡아보고 모 서점에 가서 패션잡지 두 권을 사서 나름 고심하며 스케치를 마쳤다. 이제 남은 건 옷을 실제로 만드는 일 뿐. 친구와 원단을 뗀다는 명목으로 부모님 몰래 대구 서문시장에 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내 키는 1cm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당시의 서문시장이 어찌나 커 보이던지. 그 웅장함에 압도되고 말았다. 어색하게 상인에게 다가가 이런 원단을 찾고 있다고 물어보면 다들 없다고 대답했다. 나는 주제에 맞지 않게 꽤나 특이한 원단을 쓰겠노라 욕심부리고 있었다. 시장을 한 시간 남짓 돌았을까? 다행히도 내가 찾던 바로 그 원단을 만났다. 시장 상인이 스케치를 보더니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며 추천해 주었고, 아무것도 모르던 우리는 서로 다른 원단 두 개를 총 10마 정도 구매했다. 결과적으론 원단이 부족해서 스케치와 약간 달라졌지만서도, 뿌듯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시각디자인학과에, 나와 함께 패션디자이너를 꿈꾸던 그 친구는 산업디자인학과로 진학했다. 나나 친구나 둘 다 그토록 원하던 어릴 적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함께 고생했던 그 18살의 여름은 아직도 기억에 선명히 남아있다. 누군가는 대프리카라며 대구의 여름을 칠색 팔색할지라도, 나에게는 누구보다 시원하고 맑았던 그 여름의 대구가 이루지 못한 꿈처럼 아련히 남아있다.